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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026-07-20 17:19:20 +07:00

142 lines
5.9 KiB
JSON

{
"dataList": [
{
"content": "내리는 비는 시릴 정도로 아프다."
},
{
"content": "빗방울에는 과거의 기억들이 담겨있으니까. 그 사람에게 주워졌을 때부터, 그 저택의 면면들이 매일매일 내게 새겨 넣은 기억들이."
},
{
"content": "그래서 나는 구태여 들이치는 소나기를 막아본 적이 없었지."
},
{
"content": "기억이 자극될 때마다, 그 찢어 죽일 놈들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끝없이 상기시킬 수 있었으니까."
},
{
"content": "…그 저택에 우산이 없었던 건 아니다."
},
{
"content": "빗물이 살을 파고들려 할 때, 잠깐 동안의 안식과 행복을 주었던 우산."
},
{
"content": "그 우산은 캐서린이라는 이름을 하고 있었지."
},
{
"content": "어쩌면, 이 비를 모두 피하지는 못해도 젖은 옷을 말릴 수만 있다면 살아가 볼 만하진 않을까."
},
{
"content": "그런 착각을 주는 우산이었다."
},
{
"content": "하. 웃기지도 않지. 그런 건 차라리 없었어야 해."
},
{
"content": "결국엔 남을 위해 펼쳐 줄 우산이었던 걸, 동냥하듯 잠깐 내줬던 걸…"
},
{
"content": "나를 위하고 있다고, 사랑하고 있다고 헛된 망상이나 했다는 사실이 치욕스럽고, 부끄러웠다."
},
{
"content": "두 번 다시는 우산을 바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."
},
{
"content": "그저… 내게 장대비를 때려 부은 그 저택의 인간들에게 피가 샘솟고 뼈가 꿰뚫릴 날카로운 폭풍을 선보이겠다."
},
{
"content": "그 순간, 내 삶의 이유는 그것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."
},
{
"content": "…이 숲은 높고 조용한 곳이다."
},
{
"content": "폭풍우가 몰아치는 순간에도 그 지랄맞게 커다란 저택이 훤히 들여다보이는, 빽빽한 숲."
},
{
"content": "확실한 목적이 앞에 있을 때, 증오는 흩어지는 일 없이 오롯하게 내게 차올라 온다."
},
{
"content": "때로는 버틀러들이 빨래를 널거나, 외부의 손님이 만찬을 즐기러 들어갔다 나가는 것을 보고 잠깐씩 즐거웠던 순간순간을 떠올리기도 한다."
},
{
"content": "매사에 툴툴거리는 말투였지만 저택의 누구보다 나를 챙겨주었던 치프 버틀러의 모습도 종종 떠올린다."
},
{
"content": "…아니, 이런 건 환상이다."
},
{
"content": "지옥 같았던 시간이 과거가 되며 추억이 되고, 기어코 그것을 즐거웠던 것이라 착각하게 만드려는 약하디약한 마음의 술수다."
},
{
"content": "전부 지워버리면 된다, 전부 지워버리면… 과거와 기억을 통째로 지워버리면 이런 흔들림도 끝을 맺을 것이다."
},
{
"content": "어차피… 캐서린이라는 이름의 우산은 죽어버렸고."
},
{
"content": "이제는 정말 한순간도, 저 저택에서 내가 쉴 수 있는 자리가 없을 테니까."
},
{
"content": "이 검을 얻게 된 날이었나, 아니면 무수한 나를 만나거나 들여봤던 그날이었던가."
},
{
"content": "아니면 도련님의 저택을 공격할 때 자르고 찢으며 수많은 버틀러들의 시체를 만들던 날이었던가."
},
{
"content": "나는 쓰러트린 자들에게서 복종의 영혼을 매어두는 방법을 깨닫게 되었다."
},
{
"content": "누구에게도 가르침 받지 않았지만, 무수한 세계의 내가 으레 그런 자들을 이끌고 다니듯 나도 비슷하게 변한 것이겠지."
},
{
"content": "이들의 끊임없는 증오와 원성이 내게 들려온다. 하지만 그와 함께 내게 충성을 바칠 수 밖에 없는 불합리함이 제법 우습다."
},
{
"content": "와일드헌트의 행렬을 이끌고, 도련님의 쓸모없는 팔을 물어뜯으며."
},
{
"content": "나는 내가 직접 주최하는 만찬이 곧 그 저택에서 이루어질 것이라 외쳤다."
},
{
"content": "유예의 시간을 충분히 줄 것이다."
},
{
"content": "팔을 잃은 만큼 내게 증오를 쌓았을 그 도련님의 세검이 얼마나 예리할지."
},
{
"content": "이미 죽고 없는 마님을 하루 종일 찾고 있는 치프 버틀러의 응접보가 얼마나 단단해질지."
},
{
"content": "배신이라고 느끼고 있을 전 보모의 고함 소리가 얼마나 머리통을 뒤흔들어 댈지."
},
{
"content": "갖은 준비를 마치고 나서 만찬을 받아들여야만, 나의 복수가 빛을 발할 테니까."
},
{
"content": "충혈된 눈동자와 잔뜩 부풀어 오른 핏줄을 드러내며 나와 나의 행렬에 맞서 뛰어들기를 바란다."
},
{
"content": "그리고 나는 끝끝내 그들을 전부 짓이겨버리고…"
},
{
"content": "폭풍이 몰아치는 그 언덕 위에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진 후에 남은 캐서린을 재회할 것이다."
},
{
"content": "그리고, 그동안의 나의 설움과… 분노를…"
},
{
"content": "꺾여버린 우산 앞에 모든 마음을 다해 토해내고 소리칠 테다."
},
{
"content": "또한 남겨둔 미련과 복수의 성공도 외칠 것이다."
},
{
"content": "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던 워더링하이츠를 비로소 부숴놓았더라고."
},
{
"content": "너도… 너도."
},
{
"content": "이 빌어먹을 저택이 없었다면 행복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고."
}
]
}